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벳쇼 다케히코 (문단 편집) === [[요미우리 자이언츠]] === [[파일:벳쇼_다케히코_3.jpg]] 교진으로 이적한 벳쇼는 2개월 출장 정지 후 그라운드로 복귀, 그 해 14승을 거두며 교진의 기대에 부응했고 1950~1952년, 1954~1956년 시즌 각각 3년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빛나는 활약을 보였다. 1952년 6월 15일 [[쇼치쿠 로빈스]]와의 [[오사카]] 원정 경기에서 9회말 2사까지 쇼치쿠 타선을 무안타 무사사구 무실책에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있었지만 [[대타]]로 나온 칸자키 야스타카[* 神崎安隆(1932~1985). [[히로시마]] 출신 [[포수]]로 1951년 쇼치쿠에 입단했지만 주로 [[불펜 포수]]로 뛰며 4시즌 통산 21경기 출장에 9타수 1안타, 타율 0.111의 초라한 성적만 남겼고, 1954년 고향 팀 [[히로시마 카프]]로 이적하여 그 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프로에서 유일하게 때린 1안타가 바로 벳쇼의 [[퍼펙트 게임(야구)|퍼펙트 게임]]을 저지한 그 안타였다.] 에게 빗맞은 내야 안타를 허용하는 바람에 아깝게 [[퍼펙트 게임(야구)|퍼펙트 게임]]을 놓치기도 했다.[* 그 이전인 1950년 3월 16일, [[오사카 타이거스]]의 [[타미야 겐지로]]가 9회 2사까지 잘 막아놓고 내야안타를 맞는 바람에 퍼펙트 게임이 무산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해 6월 28일 교진의 [[나카가미 히데오|후지모토 히데오]]가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교진의 에이스로 군림하면서 1952년(33승), 1956년(27승) 다승왕을, 1955년(1.33) 평균자책 1위를 차지했고 교진의 1951~1953년, 1955년 [[일본시리즈]] 제패와 [[센트럴 리그]] 우승 8회에 큰 공을 세웠다. 1958년 교진은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벳쇼는 9승에 그치며 13년간 지속되던 그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시즌이 중단되었고, 구단과의 계약 협상 시 '''1959년 시즌 35경기 등판 보장'''을 [[옵션]]에 넣도록 요청했지만 '''선수의 기용은 감독의 전권 사항''' 이라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생각과 정면으로 대립하며 매스컴까지 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해 벳쇼의 등판 수는 26경기로 줄었고, 통산 294승을 기록하고 있던 상황에서 앞으로 7승 남은 [[빅토르 스타루힌]]의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 기록인 301승[* 현재 스타루힌의 공식 통산 승수는 303승 이지만, 1939년에 거둔 42승 중 2승은 기록원의 실수가 있었다며 40승으로 줄었기 때문에 당시의 통산 승수는 301승이었다. 1961년 [[이나오 가즈히사]]가 시즌 42승을 거두자 스타루힌의 1939년 기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그 당시 기록원의 판단을 존중하자는 커미셔너 결정에 따라 42승으로 원상복귀 되면서 통산 승수도 다시 2승이 추가되었다.]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여 이듬해 등판 경기수를 확보해 두자는 요량으로 그런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벳쇼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미즈하라에게 고개를 숙였고, 미즈하라도 가능한 벳쇼의 의사를 존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벳쇼의 옵션 파동은 일단락 되었다. 벳쇼는 1959년 시즌 7승으로 스타루힌의 (당시)기록 '''301승'''과 타이를 이루면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2번째로 통산 300승을 돌파'''했고, 1960년 4월 29일 통산 302번째 승리를 거두면서 스타루힌을 뛰어넘었다.[* 상기 언급대로 스타루힌의 공식 통산 승수는 303승이기 때문에 현재 기준으로 벳쇼가 스타루힌의 기록을 경신한 승리는 같은 해 7월 9일에 마크한 304번째 승리이다.] 1960년 9승을 보탠 벳쇼는 시즌 종료 후 선수 겸 1군 투수 코치로 계약했지만 1961년 시즌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않고 같은 해 취임한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 휘하에서 코치로만 활동하면서 교진 선수들에게 이른바 [[도깨비]] [[군조]](鬼軍曹)로 불릴 만큼 엄하게 투수들을 가르쳤고, 교진의 6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1961년을 마지막으로 벳쇼는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가 거둔 통산 310승은 은퇴 당시만 해도 일본 최다승 기록이었지만 벳쇼가 은퇴한 지 불과 2년 뒤인 1963년, [[고쿠데츠 스왈로즈]] 소속이던 [[카네다 마사이치]]가 벳쇼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벳쇼가 교진 시절 거두어들인 221승은 현재까지도 구단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훌륭한 투수였지만 타격 실력도 만만치 않아서 마운드에 오르지 않는 날은 야수로 경기에 나와 타석에 들어서기도 했다. 통산 500안타에 35홈런[* 투수로 등판하여 친 홈런은 31개로 [[카네다 마사이치]](38개), [[요네다 테츠야]](33개)의 뒤를 잇는 3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을 기록했고 생애 타율도 0.254 였으니 웬만한 수비형 야수보다 더 잘 치는 투수였던 셈이다. 벳쇼의 17시즌 간 현역 통산 기록은 투수로서 '''662경기 등판, 335완투(역대 4위), 4350.2이닝(역대 5위), 310승(역대 5위) 178패, 1934탈삼진, 평균자책 2.18'''에, 타자로서는 '''828경기 출장, 1972타수 500안타, 35홈런, 248타점, 182득점, 6도루, 타율 0.254''' 였다. 또한 정규시즌과 [[일본시리즈]] [[MVP]] 각 2회, [[사와무라상]] 2회,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6회를 수상하고 [[올스타전]]에 6회 출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